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카테리나 2세 (문단 편집) === 파탄난 결혼 생활 === [[파일:peter_iii_and_catherine_ii_by_grooth_copy_in_odessa.webp|width=400]] 그러던 어느 날 과거 외삼촌 카를 아우구스트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와 약혼했던 인연 덕분에, 1744년 자신의 육촌[*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와 표트르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가 친사촌으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Christian Albrecht von Schleswig-Holstein-Gottorf) ^^(1641년 ~ 1698년)^^를 같은 증조부로 두고 있었다.]이자 러시아의 제위 계승권자인 [[표트르 3세|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울리히]](러시아식으론 표트르)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개명하여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라고 불리게 된다. 참고로 선대인 [[예카테리나 1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표트르 1세]]의 정부에서 황후에 이어 여제의 자리까지 오를 만큼 남편에게 사랑받던 것에 비해, 조피는 평생동안 남편 [[표트르 3세]]와 부부사이도 안 좋았고 본명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감금된 표트르 1세의 누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의 독일식 이름인 [[조피]]였다. 아마도 이를 의식하고 이름을 예카테리나로 개명한 듯 하다. 종교도 [[루터파]] [[개신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다. 그렇게 시골뜨기 소녀였던 조피는 시이모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를 만나러 처음 러시아 황궁에 당도한 순간 그 휘황찬란한 치장에 넋이 빠졌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조피를 한번 뜯어보고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조피와 [[표트르 3세|표트르]]의 결혼이 정해졌다.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로서 러시아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는 신혼 무렵엔 같은 [[독일인]]이라는 점 때문에 나쁘지 않은 사이였지만, 예카테리나가 주변 사람들의 냉대와 옐리자베타 여제의 경계를 완화시키기 위해 점차 친러시아 노선을 걷자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게다가 남편은 장난감 병정이나 기차만 가지고 노는 머리 나쁜 인물이었던데다 심각한 성불구자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래서 장기간 부부 관계가 없었고 18년간 각자 정부를 두고 살았다. 처음에 예카테리나는 남편에게 맞춰주려고 하다가 결국 남편을 혐오해 9년 동안 피해다니면서 부부 관계도 같이 회피했다. 그러다 엘리자베타 여제가 '''"자식 안 낳을 거면 너도 나가!!"''' 등의 사인을 보내자 겨우 첫 아들 파벨을 낳은 후 자신도 마음껏 놀아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세 아이 모두 각기 다른 정부의 아이였다는 풍문도 돌았지만 아들인 파벨을 보면 성격이나 생김새나 남편과 붕어빵이다. 나머지 자식은 요절한 둘째는 생부가 누구인지 알수 없다는 설이 엇갈리고, 막내 아들은 명백하게 사생아라 러시아 황족이 받는 대공이 아닌 일반 귀족으로 백작 작위만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